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와 아이들의 주요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가요대상 대상'''
노사연
'''만남'''
(1991년)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년)'''

김수희
'''애모'''
(1993년)
김건모
'''핑계'''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
Come Back Home
(1995년)'''

김건모
'''스피드'''
(1996년)

''' 스타상 가수부문 대상'''[42]
-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년)'''

김건모
'''핑계'''
(1994년)

[image]
'''서울가요대상 대상'''
태진아
<거울도 안 보는 여자>
(1991년)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년)'''

김건모
<핑계>
(1994년)



'''오른쪽부터
서태지양현석이주노
'''


'''서태지와 아이들'''
Seotaiji and Boys
Taiji Boys

}}}
<colbgcolor=#303030><colcolor=#FFFFFF> '''그룹명'''
'''서태지와 아이들'''
'''Seotaiji and Boys
Taiji Boys'''(영어)
'''장르'''
댄스, , /힙합
'''리더'''
서태지
'''활동 기간'''
1992년 3월 14일[1] ~ 1996년 1월 31일
'''데뷔'''
1992년 3월 23일[2] 정규 1집 난 알아요
(데뷔일로부터 '''11946일'''째)
1. 개요
2. 결성
3. 영향력
3.1.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
3.2. 방송국과 가수의 관계를 재정립하다
3.3. 가요계 트렌드를 재편하다
3.4. 기성세대와의 갈등
4. 팬덤
5. 해체 & 은퇴
6. 계승되는 정신,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
7. 후대에 미친 영향
8. 정규앨범 목록 & 메인 활동곡
10. 수상
11. 공연실황
12. 근황
12.1. 20주년 기념

[clearfix]

1. 개요



'''서태지와 아이들의 역사에 대해 정리한 영상'''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역사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20세기 대한민국 최고 히트 상품 1위'''

삼성경제연구소 #

1990년대를 넘어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아이콘'''
1991년 9월에 결성된 3인조 음악 그룹으로, 1990년대 초반 대한민국 가요계에 혁명과 같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고 큰 지각변동을 일으킨 팀이라 평가받는다. 대한민국 가요계 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영미권 대중음악계의 비틀즈나 너바나나 마이클 잭슨에 못지않다.[3]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보컬, 작사, 작곡 및 연주, 프로듀서등 음악 전반을 책임진 서태지를 네임리더[4]로 둔 그룹. 서브보컬과 안무를 맡은 양현석, 이주노와 함께 1991년에 결성한 3인조 댄스 그룹이다. '서태지'라는 이름도 촌스럽고,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팀명도 병맛이라고 하던[5]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이러한 논란을 데뷔 앨범부터 갖춰진 탄탄한 실력으로 잠재웠다.
1992년1집 난 알아요로 데뷔했으며, 1996년에 은퇴&해체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해체 이후에는 각자의 음악활동들에 전념하고 있다.

'''특종 TV연예'''
서태지와 아이들을 대중에게 알렸던 특종 TV연예 방송이다. 특이한 것은 아침마당 진행자로 유명한 이상벽이 연예부 기자 직함을 달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상벽은 나훈아, 김지미의 결혼 특종도 냈던 연예부 기자 출신이자 연예 평론가로서 책도 냈었다. 그의 이미지를 바꾼 아침마당은 이 방송과 거의 비슷한 시기 (1주일도 차이 안 난다) 에 시작했다.[6]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 방송으로 데뷔를 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데뷔하고 한 달쯤 지난 시점에서 방송한 것이다. 이 방송이 나오기 이전에도 여러 매체에 출연해서 노래도 했었다고 당시 매니저였던 최진열이 증언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 3월 14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291회에서 첫 데뷔 무대를 가졌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무대

2. 결성


시나위의 베이시스트였던 서태지시나위가 해체된 이후, 정통 락 뮤지션으로서는 드물게, 8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생소하던 음악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랩 장르를 바탕으로 한 획기적인 댄스 그룹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마이하우스라는 나이트클럽 업소에서 활동하는 무궁화 밴드의 멤버로 있을 때 같은 업소에서 일하면서 댄스 그룹 활동에 도움이 되고자 춤을 배우기 위해서 소개받은 양현석에게 자신이 작곡하고 있던 음악들을 들려주게 된다. 1년간의 군 생활 뒤 의병제대한 양현석은 서태지가 들려주었던 음악들을 잊지 못해 제대 후 다시 서태지를 찾아오고 때마침 댄서들을 구하고 있었던 서태지와 합이 맞은 둘은 듀엣을 결성하기로 하고 녹음까지 완료했으나, 추가 멤버를 들이기로 하고 수많은 이태원 댄서들을 둘러보다가, 박남정과 프렌즈로 활동했었던 이주노를 최종 멤버로 영입하면서 3인조 댄스 그룹이 되었다.
여담으로 이주노가 나중에 합류하는 바람에, 서태지와 아이들 1집에는 이주노의 목소리가 없다. 이 사실을 양현석이 20년 만에 자기 입으로 직접 말했다. 이 때문에 이 항목 상단부에 있는 영상에서 보듯 방송에서 사용한 '난 알아요' 음원은 앨범 음원이 아니라 이주노의 목소리까지 덧입힌 버전이며, '환상속의 그대'는 아예 여러 버전의 믹스를 새로 발매하여 활동했다. 사실 양현석은 이주노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형이었기 때문에, 팀내 불화가 생길까 염려되어 받아들일까말까 망설였으나 그래도 같은 댄서 출신인데 통하는데가 있으리라 판단하고 이주노를 팀에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아이돌 그룹이 아닌 어떤 단체라 할지라도 굉장히 희귀한 사례인 '''막내가 리더인 그룹'''이었다.[7][9] 나이가 제일 어린 서태지가 팀을 통솔한 것이다. 그 다음 서열은 나이가 두번째로 어렸던 양현석이었다. 이 때문에 팬들 중에선 그들을 우스갯소리로 '서태지와 어른들(...)'이라고 부른 팬들도 간혹 있었다.[10]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그룹 이름은 리더인 서태지가 지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양현석힐링캠프에 출연해, 원래 이름은 "태지보이스(TAIJIBOYS)"였는데[11] 매니저에 의해 멋대로 "서태지와 아이들"로 바뀌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앨범 부클릿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표현은 1집에서만 등장하고 2, 3, 4집에서는 'SeoTaiji and Boys'라는 영어식 표기가 대신 등장한다.
아무튼 서태지가 중심에 놓인 그룹 이름과 막내가 리더라는 점에서 드러나듯이 서태지 개인의 비중이 컸던 그룹으로, 장르나 스타일은 다르지만 너바나커트 코베인과 비슷할 정도로 리더로써 서태지의 영향력이 강력했다. 이는 서태지가 단순한 작곡자 차원을 넘어 안무 구성을 제외한[12] 음악, 컨셉, 제작 활동의 대부분을 서태지 본인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피투게더에서 서태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수입 역시 3:3:4로 본인이 4를 가졌고, 음반은 본인이 제일 많이 관여를 했기에 2:2:6으로 6을 가져갔다고 밝혔다. 예외적으로 1집의 '이 밤이 깊어가지만'과 3집의 '널 지우려 해'는 양현석이 작사를 했으며, 락밴드로 변신한 이후에 4집에 'Come Back Home'과 같은 힙합곡이 수록된 것도 양현석의 제안이었다고 한다. 양현석과 이주노는 1, 2, 3, 4집 의 대부분의 안무를 만들었다.

3. 영향력


[image]

3.1.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후, 한국의 대중가요계는 성인가요와 발라드 위주에서 10대 취향의 댄스음악 위주로 재편되었으며, 단순히 트렌드의 변화와 차원을 달리하여, 영미 팝이 한국 음악, 특히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지던 시절에 이들은 영미 팝 가수들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가지고 있던 영향력, 특히 "10대·20대의 지분"을 송두리채 떼어 한국 가요로 가져오는, 혁명적인 역할의 선봉이 된다.
또한, 현진영과 같이 '''한국어는 구조상 랩이 불가능하다.'''라는 당시 전문가들의 선입견을 무너뜨리고, '''댄스와 랩을 대중화'''시켰다. 2집 하여가에서 최초로 국악과 흑인음악(힙합), 헤비메탈을 접목하고, 3집에서는 랩 메탈, 4집에서는 갱스터 랩 등의 앨범을 들고 나올 때마다 새로운 장르를 도입, 소개하면서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에 신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기 직전 상황의 가요 톱텐에서는 태진아가 <거울도 안 보는 여자>로 1위를 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 보기 드문 다양한 음악색을 보여주던 조용필, 김연자 등의 성인 가요 네임드들이나 신승훈, 변진섭과 같은 세련된 발라드 가수들, 김수철, 신해철, 현진영 등 해외 뉴웨이브를 받아들이던 음악인들도 음악산업 저변에서나마 힘을 썼으나, 이들의 대부분은 대중매체라 할 수 있는 TV보다 전문적 영역에서의 공연을 더 많이 했기에 당시 TV의 뒤쳐진 문화는 당시 10대·20대가 따라가고 싶던 힙합, 현대적인 댄스팝뮤직을 비롯한 "세계적인 트렌드"와의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80년대를 지나 민주화가 된 90년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발라드트로트만이 일상이었던 사회상속에 이미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기지개를 켠 상황에서 새로운 유행을 따라가고 싶은 구매력까지 갖춘 10대와 20대와 젊은이들은 있는데, 만족시킬 만한 한국어 콘텐츠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랩뮤직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 1990, 91년 바로 이듬해인 1992년도에 '한국어 랩'과 '회오리춤'을 들고 서태지가 나타났다.[13] 10대, 20대들이 원하던 세계적인 트렌드와 한국 음악 사이의 간격이 기적과 같이 좁아지고 억눌려져 있던 젊은층의 수요가 한꺼번에 폭발하였던 것이다. 단순히 랩 음악을 한국에 반짝 유행시킨 정도가 아니라, 이로 인해 '''대한민국 가요계의 판도를 현대식 댄스뮤직과 랩뮤직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이 글을 읽고 감이 잘 오지 않는 10대~30대 초반의 위키러들을 위해 간단하게 예시를 들어보자.
그 당시 문화적인 충격을 2010년대 후반~2020년대 세대가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러한데, 라디오는 7개[14]에 TV 채널은 지상파 5개[15]뿐이고, 인터넷과 케이블 방송도 없다. 민주화라는 것이 어느 정도 정착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검열로 인해 TV에서는 머리를 기르거나 염색한 남자도 못 나온다.[16] 한국 영화는 흔히 말해 "내돈 주고 보기 아깝다."라는 수준이고[17], 지금 TV에 나오는 K-POP 가수들이 없었고 당신은 어린 시절부터 한국 아이돌은 한 번도 본 적도 없었으며 오로지 방송에는 발라드 가수나 트로트 가수, 뽕짝 멜로디의 댄스 가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해외 팝 뮤직을 보면 한국과는 전혀 다르다. 형형색색 다양한 패션을 갖춘 형, 누나들이 훨씬 더 감각적이고 파격적인 음악을 하고 있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멋진 춤을 추고, 신선한 장르의 강렬한 노래를 부른다. 발라드도 좋지만, 해외의 가수들처럼 젊은 사람들 구미에 맞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
그렇지만 어제 뮤직뱅크에서는 여전히 송가인이 수십 년째 지겹게 들어온 트로트로 5관왕을 했고 역시나 임영웅이 트로트 메들리로 지상파 방송사 가요 차트를 쓸고 있는 상황이다. 또 발라드 가수들이 신스음 하나 없는 브라스 밴드에 맞추어 부르고 있다. 그런데 오늘도 송가인이 이겼나 임영웅이 이겼나 보려고 TV를 틀었더니 난데 없이 오늘 방탄소년단(이하 BTS)라는 신인 그룹이 '피 땀 눈물'이란 랩과 강렬한 비트를 토대로 군무가 잘 짜여진 노래를 들고 나왔단다. 심지어 19세밖에 안 되었다는 멤버 RM의 자작곡이란다. 바로 어제까지 텔레비전을 틀면 트로트와 발라드 말고는 다른 음악은 듣기가 힘들었는데, 평생 그런 것을 보지 못했고 외국의 것을 갈망만 했던 10대, 20대가 듣고 보는 충격은 어느 정도였을까?
다음날 학교에서 아이들이 BTS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않을까? 평생 국내 음악에서 트로트와 발라드만 듣고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라 예상했던 아이들이 상술한 것처럼 완전히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방송에서 봤다고 생각해보자.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져왔던 충격을 요즘의 아이돌이 해낼 수 없는 이유다. '''애초에 이전에는 아예 없었던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전에도 댄스 곡을 했던 가수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나미, 민해경,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이 한국 댄스가수를 비롯한 아이돌의 효시라 볼 수 있겠지만 팝과 흑인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의 댄스 뮤직과는 다르게 기존의 성인가요를 빠른 템포로 바꾼 것에 불과한 음악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흑인 음악을 기반으로 데뷔한 첫 남성 솔로 댄스 가수는 현진영이 있었지만 활동기간 내내 원톱을 찍었다고 보기는 힘들었으며, 위의 모든 댄스가수들 전부 당시의 주류였던 트로트, 포크 음악으로 대표되는 한국 음악계의 주류를 크게 바꿔놓지는 못했다.
1980년대 들어 영미의 팝음악은 다양한 장르의 탄생과 마이클 잭슨 등 대스타의 등장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국내에서도 이들 영미권 팝스타의 인지도는 특히 10~20대에게 대단해서 동네 레코드샵에서 빌보드 HOT 100 복사판을 나눠줄 정도였고 유로댄스 듣보잡 가수의 내한공연에도 만석을 이룰 정도였다. 반면에 국내 음악시장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부터 공윤의 검열 등의 영향으로 새로운 장르의 탄생보다는 정부가 지원하는 건전가요나 기성세대풍의 기존 음악 위주로 형성되었다.
즉, 세계의 유행을 좇아 새로운 장르를 받아들일 토양과 수요는 이미 1980년대 초중반부터 무르익었고, 경제적으로 구매력을 갖춘 10대들·20대들이 생겨났으나 한국 음악계가 거기에 맞춰주지 못한 것. 80년대, 90년대 초의 WHAM, 듀란듀란, A-Ha 등등. 특히 그 당시의 10대 소녀들에게 뉴 키즈 온 더 블럭의 인기와 파괴력은 엄청났다. 바로 수년 전의 뉴 키즈 온 더 블록 내한 당시 압사와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10~20대 취향 컨텐츠 부족은 당시 합법적으로 수입이 전혀 금지되어 일반인들은 도저히 접하기 힘든 J-POP까지 손을 뻗히면서 쿠와타 케이스케 등 당대 일본의 유명 음악 또한 1980년대 후반 암암리에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했다. 참고로 그 시절은 반일감정이 지금보다 더 컸을 때이며 인터넷 같은 정보 매체가 부족했을 때였다. 그런 불리함을 딛고 암암리에 J-POP이 유행했을 정도였고 벤치마킹을 넘어서 표절까지 하는 부끄러운 사례들도 많았다.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이 아닌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10대·20대 취향에 맞는 그러면서도 서양 사람들의 전유물로만 생각되었던 랩등이 들어간 세련되고 독특한 음악과 춤을 선보였던 그 신선함과 파괴력은 엄청났다. 뉴키즈 온 더 블럭이나 듀란듀란같은 영미권 팝 아이돌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통째로 떼내어 한국인이 가져온 기념비적인 사건인것이다.

3.2. 방송국과 가수의 관계를 재정립하다


기획사 사장과 방송사 PD가 황제로서 군림하였던 20세기 시점에서, 온전히 서태지와 아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음악을 만들고 춤을 개발하여 유행시켰으며, 1집 이후는 자신들만의 힘으로 스스로 소속사를 만들어 활동하며[18]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방송 언론, 또는 음반업계의 관행, 지금보다 수배는 엄격했던 검열기준, 기득권에 저항한 행보는 단순히 겉으로만 젊고 반항적인 이미지가 아닌 세상을 바꿀 능력과 자신감을 가지고 낡고 곪아버린 기득권의 시스템을 몸소 깨부순 새시대의 상징 같은 역할을 해낸 것이다. 이는 K-POP이 아시아에 큰 영향력을 가지는 2010년 이후 지금의 시점에서도 어떤 가수도 달성하기 힘든 업적이다.
이는 결코 다른 가수들을 폄하하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활동 방식이 어느 시대에 비춰 봐도 지극히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가수들도 나름 높이 평가받을 부분이 있으나, 가수가 시스템에 맞서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서태지가 끼친 파급력이 넘사벽급이었던 것.
지금도 방송국의 권력이 강해서 몇몇 거대 기획사를 제외하면 동등한 입장에서 방송국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인데, 그것도 20대 초반 어린 가수가 직접 방송국을 향해 '''복장 규제를 하면 출연을 안 하겠다'''라든가, '''코미디 프로그램 출연을 강제하면 안 나가겠다'''고 선언한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도 괘씸죄로 찍히기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활동하던 댄스 가수들은 서태지와 아이들 덕분에 자유로운 스타일링이 가능해졌다고 고마워했다.
활동 후 잠적, 공백기를 가진 이후 다시 컴백[19]이라는 이른바 '휴식기'라 불리는 현재의 대다수 아티스트, 아이돌의 활동 패턴의 시초이기도 하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게, 당시로서는 감히 PD의 명을 거슬러 활동하지 않는다는것은 있을수 없거니와, 가수로서도 몇개월 사이 잊혀질수 있다는 공포가 있었다. 스스로 음악을 완전히 만들어야했던 서태지였고, 또 그만큼 인기가 많았기에 가능했던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1집 이후 서태지가 이런 행보를 선택했을때, 걱정 하는 사람들도 많았었고 '서태지 은퇴 발표'로 기사가 나기도 했으며, 결국 중간에 "이밤이 깊어가지만" 뮤직 비디오를 제작하여 홍보하는등 징검다리 같은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다.
레게머리나 염색, 스쿨 룩 패션(1집), 힙합 패션(2집), 치마 패션(3집), 스노우보드 패션(4집) 등을 최초로 도입해 유행시켰으며, '''매 앨범마다 음악에 따라 다른 컨셉'''이라는 시도, 또 이후 연예계에 일반화된 전속 코디네이터 제도의 도입이라든가, 많은 자본이 들어간 뮤직비디오의 질적인 향상[20] 등등...90년대 이후의 가요계 뿐만 아니라, 사회 다방면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3.3. 가요계 트렌드를 재편하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한국의 대중가요계는 성인가요와 발라드 위주에서 10대~20대 취향의 댄스 음악 위주로 재편되었으며, 노이즈, 듀스, DJ DOC, 룰라와 같은 댄스그룹들이 점점 등장하게 되었다.
댄스 음악의 등장은 이후 테크노로의 발전까지 이어지며 1990년대는 대한민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많은 장르가 공존하였으며 가장 빠른 발전을 맞이한 시대가 되었다. 또한 격렬한 안무, 각 멤버의 캐릭터 기믹 부여, 립싱크 등 현재 한국 아이돌의 기원이 되는 많은 시스템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시작으로 한 후세대의 댄스 가수부터 시작되었다.

3.4. 기성세대와의 갈등


3집부터는 단순한 음악적인 시도를 뛰어넘어 사회문제에 대한 곡을 써내려가며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문화대통령'''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현재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말 그대로 가요계의 끝판왕이 갑자기 노선을 바꾸어 사회적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에 이는 당연히 파장이 컸다. 통일을 노래한 '발해를 꿈꾸며'까지는 다들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았지만, 대한민국 교육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는 노래인 '교실 이데아' 활동이 시작되자 메스컴과 기성세대, 높으신 분들은 그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 시작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민중가요라는 사회 비판적인 가요가 대학가나 시위현장에서 많이 불려졌기는 했고, 김광석이나 양희은 같은 유명가수들도 민중가요를 불렀기는 했지만 1990년대 중반 기준으로는 청소년 취향의 음악은 아니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은 청소년 취향에 맞는 음악이면서도 파급력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즉, 최신음악에다가 민중가요적인 색체를 어느정도 혼합한 시도였었는데 이것도 히트를 치면서 불편해진 기성세대가 많아지게 된것.
3집의 이러한 시도는 대중성을 많이 포기한 대신, 충성스러운 매니아 팬들을 결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작 서태지와 아이들은 파격적인 음악(락)과 가사로 인해 3집 당시 치마패션[21] 등으로 방송 금지 및 이에 준하는 박해를 받았고, 사실상의 3집 활동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인터넷, 케이블 음악방송은 이제 막 시작했을대라서 지상파가 거의 유일한 흥보 수단이었던 시기 그 당시에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으나, 이것은 오히려 서태지와 아이들, 특히 서태지가 뮤지션으로서 영원할수 있는 큰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대중은 다른 가수들, 10대·20대 가수들에게도 음악성과 함께 비판적인 가사 등을 다루어 줄것을 요구, 또는 비교 하게 되었다. 오히려 서태지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 하던것은 사회적인 메시지를 구가 하지 않은 1, 2집이었음에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이후 대중이 서태지를 기억하던 시각은 인기와는 별개였던 것이다.
이것은 90년대 아이돌 그룹들이 사회 비판적인 노래를 부르는 데까지 영향을 준다.[22] 4집의 타이틀곡이었던 'Come Back Home' 같은 경우, 그 곡을 듣고 가출을 했던 청소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뉴스까지 나왔을 정도. 이후 이 앨범의 일부 수록곡들의 가사 문제로 판매가 금지된다는 얘기가 나오자 가출 청소년들의 부모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판매 금지가 부당하다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는 심지어 21세기 아이돌인 방탄소년단의 음악적 행보에도 영향을 주었다. 후술하겠지만, 실제로 외국의 케이팝 전문 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언급하는 부분이다.
그 당시 신문, 방송들을 보았을때, 심지어 서태지를 다룬 인간시장에서도 지금으로서는 상당히 단순한 서태지의 랩음악에 대하여 '''파괴적이고 위험하다'''라며 적개심을 드러 내었는데, 당시 언론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행보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매 앨범, 컴백 마다 달라지는 음악과 패션등에 대하여 머리색깔, 의상, 음악 스타일, 가사 등을 문제 삼으며 집중 포화를 쏟아 내었다. 참고로 1990년대는 신문이 구독률 70%에 육박하던 시절로 영향력이 대단했고 3대 방송사들도 광고시장의 성장에 따라 매년 매출액 신기록 달성을 하던때였으며 그나마 대항매체라 할수있는 PC통신은 비싼요금과 느린속도로 파급력이 미약했는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불리한 상황속에서도 사회에 울림을 주는데 성공했다는 점에 있어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위상이 어느정도로 대단했는지 알수있다.
'''언론이 띄워줬기에 성공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틀린 이유다.''' 이는 2000년도 이후, "한류", 또는 "K-POP"의 선봉으로 개인적인 처신 문제외에 큰 제약을 두지 않고 오히려 "국위선양"의 이미지 까지 가지고 가는 현재의 아이돌 활동과는 천양지차로 다른 것이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동했을때와 K-POP이 세계적으로 흥행했을때랑은 언론의 위상이나 세계적인 파급력에 있어서 환경이 천지차이로 달라진것도 감안은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2000년대 중반 ~ 2010년대에도 똑같이 발생했다. 2007년 원더걸스의 Tell me가 대히트하며 한국 음악계는 아이돌들이 점령[23]하게 되었는데, 기성세대들은 아이돌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한국 음악은 망했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주된 레퍼토리는 '외모로만 뽑혀서 실력이 없다', '립싱크하느라 입만 벙긋벙긋하는 것들이 무슨 가수냐', '다 똑같이 생겨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떼거지로 몰려나온다' 등등이었는데, 악플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생기기 이전이라 당시 아이돌들은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한류의 핵심 동력은 드라마[24]도, 게임도 아닌 케이팝이었고, 케이팝이 인기있는 이유는 아이돌이었다. 기성세대가 그토록 바라던 한국 문화의 세계화는 그들이 사랑하는 '진짜 가수'가 아니라 아이돌들이 이루어냈다. 그리고 빌보드 주간 차트 1위를 찍은 가수는 나훈아가 아니라 방탄소년단이었다.[25]
비틀즈마저도 초창기에는 기성세대의 미움을 받았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대중문화의 흐름은 10~20대가 주도해야 한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비틀즈를 들으며 자랐던 세대들이 서태지를 비난하고, 서태지를 좋아했던 세대들이 아이돌들을 비난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미래에도 같은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26]

4. 팬덤


서태지와 아이들은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역사를 뒤져봐도 끝판왕 급이었고, 남성 그룹인데도 당대의 10~20대 소년들에게도 절대적인 충성도를 자랑했었으며, 웹툰 작가 정철연도 2007년 <마린블루스> 시즌 2.5에서 자신이 중학생 때 태지보이스 열성팬이라고 언급했다.
2집까지 IVY[27]라는 공식 팬클럽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팬클럽의 상업화를 우려한 서태지의 의견에 따라 해체되었다. 대신 간단한 절차를 통해 등록만 하면 비공식 팬클럽의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YOYO(요요), PWOT(포트)가 가장 대표적인 비공식 팬클럽에 해당하는데, 팬클럽마다 응원도구도 가지각색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당시 영상을 보면 노란 형광 우비에 노란 봉을 흔드는 팬클럽이 요요, 보라색 우비에 흰 야광봉을 흔드는 팬클럽이 포트이다. 이 외에도 빨간 우비에 흰색 풍선, 금색 우비에 금색 봉 등 다양한 응원도구를 갖고 응원하는 팬클럽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 요요의 파워가 가장 막강해서인지 딱히 팬클럽에 속하지 않던 팬들의 경우 대체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응원할때 노란색 봉을 흔들곤 했다. 자연스럽게 노란색은 서태지의 상징색으로 자리잡아 은퇴 이후에 서태지의 솔로컴백때도 노란 손수건이 서태지 팬덤의 응원도구가 되었다. [28]
서태지와 아이들은 드림콘서트에서 3층 센터석을 당대 최고 가수들의 팬클럽만 앉을 수 있는 자리로 만들어버린 가수였다. 사실 3층 센터석이라고 해서 별로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1995년 1회 드림콘서트의 참가 가수 중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 서태지"공식 팬클럽 같은거 인정하면, 공식 팬클럽이 아닌 사람은 팬도 아니란거냐?" 라는 말과 함께 공식 팬클럽을 해체한 상태였다.
그래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약하던 시대에는 전국의 초, 중, 고, 대학생들과 남녀노소 누구나 모두 다 좋아했었고 라이벌로 맞설 수 있었던 가수들이 사실상 없었던데다 싫어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기때문에 2010년대 현재의 대중가요계처럼 '''"나는 OOO 팬인데 너는 누구 팬이냐?"'''라고 묻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냥 서태지와 아이들 + 다른 가수를 좋아한다 정도의 느낌. 이러니 당연히 여성 팬들은 어땠을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9]
사실상 공식적인 팬클럽의 규모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았기 때문에 가장 좌석이 많은 3층 센터석을 배정한 것이다. PC 통신상의 팬클럽 참가의사를 체크해서 3층의 하프 센터를 배정했는데, 드림콘서트 당일 동원된 인원 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워낙에 많아서 그냥 3층 센터 전체를 차지하게 되어버렸다. 즉, 이 시기부터 '''"3층 센터는 다른 팬클럽에게 주려고 한 자리를 먹어치웠다."'''라는 이미지가 조성되었고 2년 뒤인 1997년엔 당시 최고 주가를 자랑하던 H.O.T.가 차지하면서 당대 최고 가수들의 팬클럽을 위한 자리라는 이미지가 생겨난 것이다.[30]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이후 팬덤은 솔로 뮤지션으로 컴백서태지, 1세대 아이돌인 H.O.T.젝스키스, 그리고 양현석이 프로듀싱한 킵식스, 지누션, YG 패밀리 등으로 갈라지게 된다.[31]

5. 해체 & 은퇴


1996년 1월 중순, 4집의 가사, 이데올로기 등에 대한 온갖 탄압을 견디며 제2 활동곡인 <필승> 라이브를 뚝섬에서 마친 서태지와 아이들은 갑작스럽게 완전히 잠적하였다. 잠적 후 팬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뉴스에서 다뤄질 정도로 논란이 있었고, 멤버들이 죽었다는 설이 파다하게 나도는 등등 며칠간 굉장히 큰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얼마 후...
'''1996년 1월 31일, 성균관 유림회관 기자회견장에서 서태지의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여 주었다"라는 말 한 마디로 서태지와 아이들은 은퇴한다.''' 전국의 초, 중, 고, 대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와 허탈감에 빠졌으며 심지어 3대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으로 소개되었다.# 이 때문에 한때는 조직폭력배가 은퇴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했을 때 대중들의 반응은 현재 현역으로 활동하는 아이돌 가수들의 팬들만 아쉬워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청소년들의 영원한 우상이라고 불리던 인기 최정상의 아이돌 그룹이 어느날 갑자기 뜬금없이 은퇴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 서술의 내용이 단지 서태지와 아이들을 띄우기 위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과장을 조금 덧붙여서 거짓말이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이 하야했다는 반응과 거의 비슷했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10~20대 정도의 학생들은 너 나 할것 없이 모두 다 큰 충격에 빠졌으며 "사실상 대중가요계가 텅 비었다"는 반응이 나왔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당장 1년 전에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보다도 그 실질적인 임팩트는 컸다.''' 은퇴가 확정된 것이 아닌 발표만 났던 1월 20일~30일 사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야기는 학교 아이들 간 최고의 소재였다.[32]
심지어 골수 여학생팬들은 해체를 반대한다면서 매일마다 서태지의 소속사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였을 정도였다. 일부는 집에 담넘어 들어가 서태지가 사용한 물건을 가지고 나오기도 했다. 이 때 각 일간신문 사회면에서는 "X세대, '집단 히스테리' 증상", "난장판이 된 서태지 집 앞", "오빠부대 '집단 히스테리' 증상", "자살도 불사하겠다", "서태지의 결혼/은퇴에 대비해 300여 명 자살 클럽 결성설" 등지의 제하를 달아 보도했다.
당시의 증언을 빌리자면, 나이어린 초등학생들 고학년 사이에서도 도대체 왜 해체하는데? 라는 말밖에 안 나왔다. 초등학생들도 저학년들은 시끄럽고 알 수 없는 노래를 한다고 싫어하는 친구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고학년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싫어하는 반응은 거의 없었다. 형, 누나, 언니, 오빠들이 매일마다 서태지의 음악을 들었고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어서 만화를 보면서도 지상파 음악방송 할 시간에는 당연히 채널을 돌리니까 노래 들으면서 랩 열심히 연습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막 나타났던 M.NET, MTV에서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는 정말 지겹게 흘러나왔다.[33] 초등학생 고학년 정도라면 서태지와 아이들은 늦게나마 듣고 자랐기 때문에[34] 싫어하지도 않았고 무대에서의 퍼포먼스는 멋지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 세대는 H.O.T.젝스키스의 데뷔를 보면서 1세대 아이돌을 응원하는 중심세력이 된다.'''[35]
이런 이유로 앞으로도 아이돌 가수들이 은퇴를 했을 때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큰 충격을 받는 대중들의 반응은 앞으로도 나오기가 어려울 것이다"라는 의견도 있었고, 조정선 MBC PD도 <MBC 가이드> 1997년 3월호 기사에서 서태지에 대해 긍정적이었으나, 그가 떠난 자리는 비슷한 패턴을 지닌 랩 댄스 음악으로 황폐해졌다고 하면서 "서태지의 음악이 과연 혼자만의 음악이 아닌, 대중음악의 다양성에 기여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조윤진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광팬으로 나오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을 정도로 시대 고증에 너무 잘 맞았고, 골수팬들의 충성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극 중에서 조윤진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하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예 식음을 전폐하자 삼천포가 못내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왔을 정도로 골수팬들의 반응은 거의 다 그랬다.

6. 계승되는 정신,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


하지만 이들이 남긴 자유와 도전정신은 죽지 않았다. 은퇴한 지 두어 달 뒤인 1996년 3월, 비영리단체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이하 서기회)'가 발족되어 전국적으로 13,000여 명을 두었다. 강민경 당시 회장은 <내일신문> 1996년 12월 4일자 48면 인터뷰 기사에서 서기회가 팬클럽이 아닌 서태지의 뜻을 이어받은 문화단체라 하여 "맹목적인 열광이 아닙니다. 서기회 회원들은 모두 '태지보이스 팬답게 '''행동'''하자'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라고 밝혔다.
이들의 활동은 1996년 노동법 날치기 때 PC통신상의 활동에서 드러났다.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얘기하는 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정신'이라는 믿음으로 블랙리본 내걸기를 제안했고, 사회문제란인 '시대유감'과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는가'란 토론방에서 10~20대의 젊은 회원들이 총파업 지지글을 올리는 등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 나우누리의 서태지와 아이들 팬클럽도 "태지보이스가 그렇게 부르짖던 자유와 도전은 모두 민주주의 아래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에 우리는 비민주적이고 국민을 기만한 노동법/안기부법 개악을 개탄하며 민주주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여 '근조 민주주의'라고 적힌 검은 리본을 내걸었다.
한편 같은 해 7월 30일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도 당사 총재실에서 서기회가 준비한 영상 콘서트 축하 메시지[36]를 녹화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좋은 의미에서 우리나라 신세대의 대표적 존재로 보며 소중히 생각한다"며 "서태지와 아이들은 은퇴했지만 예술인이란 대중의 사람으로 대중이 원하면 하루 속히 복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특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대표곡 <발해를 꿈꾸며>에서 "언젠가 우리 작은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갈려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가 있을까"란 가사를 외우며 "이런 가사는 정말 감동적"이라 평했다.
그 외에도 태지보이스의 활동 내용을 담은 <보이는 길 밖에도 세상은 있다>라는 책을 냈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정기적으로 '무대의상 바자회'를 열어 사회 환원에도 힘썼다. 이들의 활동은 2000년 서태지 컴백 뒤까지 이어졌다.

7. 후대에 미친 영향


2010년대 이후 케이팝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고, 특히 방탄소년단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케이팝을 다룬 각종 매체나 서적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케이팝의 시초로 거론되고 있다. 안드리안 베슬리의 저서 <BTS(케이팝의 아이콘)> 서론을 보면, 방탄소년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먼저 90년대 케이팝의 아이콘인 서태지와 아이들을 언급한다. 외국인의 시각을 알아보자는 의미로 소개한다.

우리가 케이팝이라고 일컫는 한국음악은 1992년 시작되었다. 포문을 연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로, TV 쇼에서 '난 알아요'라는 노래를 발표하며 화려한 공연을 선보였다.

방송마다 피날레를 장식했던 이들의 퍼포먼스와 노래는 미국과 한국의 팝을 혁신적으로 섞어 표현한 것이었고, 금방 음악챠트를 17주 동안 점령했다.

서태지와 아이들(후에 BTS는 서태지 공연에 초대되었다.)은 미국 락, 팝, R&B 그리고 특히 1990년대 힙합 음악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새로운 그룹이었다. 미국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한국의 가요로 그들만의 특별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당시 한국은 보수적인 도덕적 잣대의 영향력 안에 있었고, 성적인 묘사, 마약, 술[37]

등은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의 미디어에서 금지했었다. 그리고 사회 또는 정치적 이슈를 담은 음악 또한 금기시했다. 아티스트들은 그저 매력적이더라도 무해한 음악을 할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다른 행보를 선택한 선구자 격인 그룹이었다.


넷플릭스 다큐 <케이팝의 모든 것>에서도 서태지와 아이들을 캐이팝의 시작으로 소개한다고 한다. 해당 프로 소개 영상
해외 음악 웹진 VICE에서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방탄소년단과 같은 사회 의식을 다루는 케이팝 그룹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자세하게 다뤘다. 링크
2019년 10월에 올라온 틴 보그[38]의 케이팝 역사기사에도 언급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1990s: Seo Taiji and Boys'''

While the emergence of "true" K-pop can arguably be traced back to acts that debuted ahead of the '90s, it wasn't until the debut of one particular group that the genre as we know it officially blossomed into existence: the veritable kings of K-pop, Seo Taiji and Boys.

'진정한' 케이팝의 등장은 9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특정 그룹이 데뷔한 후에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존재한다. 그 그룹은 바로 케이팝의 진정한 왕,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While Korean music was far from flourishing before Seo Taiji and Boys, most of the country's culture was actually influenced by creations from American and Japanese folk music – given the country's roots in both countries.

한국(대중)음악은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는 번창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이 나라 문화의 대부분은 미국의 포크송과 일본 엔카에서 비롯된 창작물의 영향을 받았다. 이 나라(현대사)의 뿌리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Following South Korea's lift on travel restrictions for its citizens in 1988, it soon became much simpler for artists to research and take in musical elements from other cultures and foreign countries.

1988년 대한민국이 해외여행 자유화를 실시함에 따라, 아티스트들이 외국으로부터 음악적 요소를 연구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곧 훨씬 더 간단해졌다.

This would eventually result in more ways for artists to experiment in their music – thus paving the way for bands that had "new" sounds to them, i.e. Seo Taiji and Boys.

이것은 결국 아티스트들이 음악적 실험을 할 수 있는 더 많은 방법을 제공했으며, 따라서 '새로운' 소리를 가진 밴드들, 즉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밴드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The trio consisting of Seo Taiji, Yang Hyun-suk, and Lee Juno came out of the gate swinging with a fusion of American rap and Korean lyrics.

서태지, 양현석, 이주노로 구성된 3인조는 미국의 랩과 한국어 가사를 융합하여 활기차게 데뷔했다.

The Boys didn't fare very well during their first televised appearance on a talent show in 1992, receiving the lowest rating from the jury, but it didn't matter.

그들은 1992년 첫 출연한 TV 프로그램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Fans had heard enough to propel the outfit to stardom simply based on the song they performed during the show.

팬들이 그들을 스타덤에 올려준 배경에 그 TV쇼에서 선보인 노래가 있었다.

"I Know" hit the charts and remained there, skyrocketing to number one on the South Korea singles charts and dominating the position for over 17 weeks.

난 알아요는 차트에 올랐으며 한국 싱글 차트에서 1위로 치솟으며 17주 이상 그 자리를 지배했다.

There's no "official" date on record for the turning point of K-pop, but many credit its origins to Seo Taiji and Boys' tumultuous television debut and the wave of success that followed.

케이팝의 전환점을 기록한 '''공식''' 날짜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기원을 서태지와 아이들의 떠들썩한 텔레비전 데뷔와 그 뒤를 이은 성공의 물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Seo Taiji and Boys melded Western-style pop music with lyrics in Korean that went above and beyond the cultural norms acceptable in popular culture at the time.

서태지와 아이들은 당시 대중문화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문화적 규범을 넘어서는 한국어로 된 가사와 함께 서양식 대중음악을 혼합했다.

Much of South Korea's early pop music had distinct American and Japanese influences, and a glut of artists was performing "trot" music, or tunes derived from American and British folk songs with Korean-language lyrics that, for the most part, featured lyrics that spoke out against the country's colonial authorities.

한국의 초기 대중음악의 상당 부분은 미국과 일본의 뚜렷한 영향을 받았고, 당시 넘쳐 나던 아티스트들은 "트로트" 음악, 즉 한국어와 한국어로 된 가사를 사용한 미국 및 영국 민요에서 파생된 곡들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이 곡들은 대부분 식민지 당국에 반대하는 가사를 특징으로 했다.

Combined with ballads and slower, country-type music, this was basically the status quo of the time.

발라드와 느린 컨트리 타입의 음악의 결합은 기본적으로 그 시대의 현상이다.

Seo Taiji and Boys' implementation of hip hop and new jack swing marked a turning point in the genre for their willingness to break tradition.

서태지와 아이들의 힙합 구현과 뉴잭 스윙은 전통을 깨고자 하는 의지로 장르적 전환점을 만들었다.

Their sound had a jagged, “urban” edge to it – musically, something similar to what you might hear from New Kids on the Block at the time in terms of a “hip hop” swagger – and as such, their popularity in South Korea opened up several doors for them as well as a number of groups that immediately sprang up looking to capitalize on or replicate their success.

그들의 사운드는 들쭉날쭉한 어반 엣지를 품고 있었다. 음악적으로 당시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힙합 스웨거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인기는 즉시 그들의 성공을 이용하거나 따라하려는 많은 그룹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Copycats began streaming in, all borne of the entertainment industry's desire to churn out the Next Big Thing – and what would ultimately be refined into the "idol culture" we know today.

카피캣은 모두 연예계의 차세대 거물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열망을 품기 시작했고, 궁극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돌 문화"로 다듬어질 것이었다.

(중략)

The first wave of idol groups came soaring in after Seo Taiji and Boys made their mark on history.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후 첫 번째 아이돌 그룹의 물결이 치솟았다.

In the late '90s, three music studios jumped onto the scene: SM Entertainment (or SM Town), the Yang Hyun-suk-founded YG Entertainment , and JYP Entertainment created by J.Y. Park, establishing the tried-and-true idol-making process that remains such a successful formula today.

90년대 후반, SM 엔터테인먼트(또는 SM 타운), 양현석이 설립한 YG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박진영이 만든 JYP 엔터테인먼트 등 세 음악 스튜디오가 현장에 뛰어등어 오늘날 성공적인 공식으로 남아 있는 시도와 진짜 아이돌 제작 과정을 확립했다.

(중략)

As entertainment moguls pushed further into the space, they continually took what they learned from pioneers of the genre like Seo Taiji and Boys and the bands that spawned from them and passed it on.

연예계의 거물들이 우주로 더 나아가면서, 그들은 계속해서 서태지와 아이들과 같은 장르의 선구자들로부터 배운 것을 가져다가 그들에게서 생겨난 그룹들에게 물려주었다.

(중략)

BTS has made it their business to adopt a model similar to the band that started it all, Seo Taiji and Boys, choosing to sing about more serious matters: relationships, societal pressures, and other narrative threads inspired by everything from Jungian philosophy to having a dream and pursuing it.

방탄소년단은 모든 것을 시작한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과 비슷한 모델을 채택함으로써 좀 더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 노래하는 것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관계, 사회적 압력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꿈을 추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카를 융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다른 맥락의 이야기도 있다.

While BTS is a product and natural result of a refined formula, the group also challenges K-pop history with their willingness to talk about things like mental health and politics.

방탄소년단은 정제된 공식의 산물이자 자연스러운 결과이지만, 이 그룹은 정신건강이나 정치 같은 것에 대해 기꺼이 이야기하려는 의지로 케이팝 역사에 도전한다.


8. 정규앨범 목록 & 메인 활동곡


<rowcolor=#FFFFFF> '''연도'''
'''제목'''
'''활동곡'''
'''판매량'''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1집
난 알아요
환상 속의 그대
이 밤이 깊어가지만
180만장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 2집
하여가
너에게
마지막 축제
220만장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 3집
발해를 꿈꾸며
교실 이데아
140만장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 4집
Come Back Home
필승
180만장

9. 음반 목록



  • 비정규앨범 - 내일은 늦으리[39] - 나를 용서해 주오,[40] 김종서 - 상실(랩 피쳐링) 수록
'''서태지와 아이들 정규앨범 1집~4집 모두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순위에 들어가있다.''' 거의 서태지 혼자 작사, 작곡하고 연주랑 노래까지 한 셈인 네 앨범들이 고작 1년여 간격으로 4년간 4장이 나왔음에도 모든 앨범이 명반이라고 불린다. 보통 전문적인 싱어송라이터도 이렇게 짧은 간격으로 작곡을 하다보면 자가복제가 되기 쉬운데 앨범마다 곡마다 장르가 다르며 뛰어난 음악성을 보인다.

10. 수상



11. 공연실황



'92 공연, 내일은 늦으리, 2집 컴백스페셜, 마지막 축제, 새로운 도전, 다른 하늘이 열리고, 4집 컴백스페셜, 1995 빅쇼, 그 외의 다양한 자선 공연 등이 있다.

12. 근황


서태지미국으로 떠난 후 1998년 5집을 발매한다. 이후 2000년 6집 발매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솔로 서태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서태지컴퍼니를 설립해서 NELL, Pia를 발굴해냈으며 서태지컴퍼니 소속 밴드들이 모두 독립한 뒤에는 2004년 7집, 2008~2009년 8집, 2014년 9집을 내며 본인의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양현석은 연예기획사업가로 대성했으며, YG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서 본인의 솔로 1집을 낸 뒤, 킵식스, 원타임, 지누션의 육성을 시작으로 거미, 휘성, 빅뱅, 2NE1, 위너, 아이콘, 블랙핑크 등 수많은 뮤지션을 육성했다. 그의 라이벌은 이수만, 박진영 같은 본좌급 연예기획사업가들이다.
이주노1996년부터 제작자로 활동하면서 아이돌 댄스 그룹 영턱스클럽을 인기 가도에 올려놓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후 솔로로 활동한 임성은, 그룹 익스트림 스파이 등은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이후에는 간간히 TV에 출연하며 안무가, 무용가로서의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모두 나이차가 엄청난 연하의 신부를 맞이했다. 서태지는 신부와 16년 차이이며, 양현석은 띠동갑 차이, 이주노는 위에 거론되었듯이 23살 차이다. 총합 '''51년''' 차이이며 평균으로 따지자면 17년 차이가 된다. 허나 이주노는 2015년 사기혐의로 피소되었고 2016년에는 성추행 혐의로 피소되어 상황이 좋은 편은 아니다.
또한 세 사람간의 관계도 그리 좋지는 않다. 특히 자타가 공인하는 베스트 프렌드였던 서태지와 양현석은 서로의 활동이 진행될수록 어째 점점 사이가 멀어져갔다. 양현석은 서태지와 마지막으로 언제 만났는지를 기억도 하지 못하더니 모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팀명을 서태지와 아이들로 정한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는 괴랄한 악담을 퍼부으며 서태지 팬들에게 완전히 찍혔다. 사실 오해인데 원래 팀명은 태지 보이스로 데뷔할려고 했는데 매니저가 제멋대로 한글명으로 서태지와 아이들로 개명시킨 거였다.
양현석이 서태지의 가장 가까운 인물들 중 한명 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태지는 9집 활동 개시 이후 그리 친하지 않던 이주노와도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지만, 정작 이주노 본인은 여러 가지 범죄 문제로 인해 상황이 좋지 않다. 사기 혐의로 생겨난 온갖 빚들은 결국 양현석이 갚아주었다고...
2019년 현재로는 사실상 서태지만 조용하고 깔끔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며[41], 양현석자신이 세운 기획사업사대스타대형사고와 자신이 주최한 데뷔 오디션 프로그램 믹스나인을 통해 데뷔하게 된 유닛의 데뷔를 말 그대로 묵살내버리는 행동을 보이고 있어서 이미지가 급추락 중이었고, 급기야 2019년 초 불어닥친 엄청난 재난과 성매매 알선의혹 등으로 자신이 만든 기획사에서 나와버렸고, 이주노는 위에도 거론했듯이 상황이 가장 좋지 않은 상황.

12.1. 20주년 기념


2012년으로 결성 20주년이 되어 서태지와 아이들 최고의 곡을 뽑는 투표를 실시했는데, 압도적인 표차로 2집의 타이틀 곡인 '''하여가'''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후를 이을만한 그룹이 20년 내에 나오겠는가?"'''라는 투표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만큼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전설의 그룹이라고 할 수 있겠다.
[image]
기사
리더인 서태지도 20주년을 기념하여 팬들에게 메세지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서태지입니다.

오늘 이렇게 많은 분들이 데뷔 20주년을 축하해주셔서 너무나 기쁘고 감사합니다.

데뷔시절엔 이렇게 오랫동안 음악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는데
지금까지도 음악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 새삼 신기하네요 ^^

긴 시간 동안 제 음악에 귀 기울여 주시고 또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리고 가슴 벅찬 나의 팬들에게
진심으로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오늘은 어쩐지 1집으로 데뷔하던 스무 살의 두근거림으로 마음이 설레이네요 ^^
이런 마음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딱딱해진 세상에서 음악을 통해 서로에게 위로가, 또 행복이 되기를 꿈꿔봅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3월 23일 서태지.
비록 20주년 기념 앨범은 나오지 않았지만, iTunes Store에서# 8집까지 있었던 음악 중 몇가지를 추려서 넣어논 음원이 있다. 당연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들을 수 없고 외국 아이튠즈 스토어를 통해야 하며 링크는 호주. 아마도 15주년 때 나왔던 서태지 마스터 콜렉션 때문에 무산된 듯 보이며 팬들은 서태지 온라인 기념관과 브라질 인근에 서태지숲을 조성했다. #

[1] 첫 방송 데뷔 기준. 팀 자체는 1991년 9월에 결성됐다.[2] 앨범 발매일 기준[3] 실제로 서태지와 아이들과 비틀즈의 경우 평행이론이 많은데, 우선 아이돌 밴드와 음악성을 모두 잡았다는 점과 대중음악의 판세를 완전히 뒤바꾸고 빠른 기간내에 해체했다는 점이 유사하다.[4] 이름이 들어간 멤버를 푸쉬하기 위해 기획되었거나, 해당 멤버의 지분율이 절대적인 팀. 이름이 들어간 멤버를 제외한 구성원은 덤이다.[5] '〇〇와 △△'식의 팀명은 70년대에도 었었고, 당시까지도 '현철과 벌떼들', '강별철과 삼태기' 등 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특히 '아이들'이란 단어가 들어간 팀명은 1992년 당시에도 촌스럽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6] 참고로, 이 영상에서는 런닝맨에 나오는 그 지석진도 나온다. 나중에는 지석진 본인도 "여기서 서태지랑 대결해 본 사람 있으면 나와 봐!"라는 식으로 농담삼아 여러 번 써먹는다.[7] 이와 비슷한 영미권 밴드의 사례로는 흑인음악 레이블 스택스의 세션맨 그룹인 '부커 T 앤 엠지스', 뉴웨이브 밴드 토킹 헤즈가 있다.[8] WINNER의 리더인 강승윤은 막내긴 하지만 동갑내기 송민호보다 생일이 느릴 뿐이다. 맏형 김진우(WINNER)와의 나이 차이 역시 2살차이[9] 어지간해서는 집단에서 막내를 리더로 세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대 와서도 이러한 구성을 가진 그룹은 WINNER외엔 찾아보기 힘들 정도.[8]리더이기 이전에 가장 막내로서 다른 구성원 모두가 본인보다 연장자인 입장이라 리더로서의 입장과 연장자로서의 입장 충돌이 일어날 위험이 가장 크기 때문. 그래서 대체로 단체에서는 어지간히 문제가 많지 않은 이상 연장자를 대표나 리더격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10] 여담으로 이원복은 자신의 만화인 '한국 한국인 한국경제' 및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 편' 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패러디한 그룹인 '''동태지와 어른들'''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부르는 노래는 난 몰라요![11] 서태지가 흠모하던 락그룹 비스티 보이즈에서 착안하여 만든 것. 이들 또한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락 사운드를 바탕으로 힙합과 랩을 덧입혀 가요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인물이었다.[12] 당연히 개별 안무야 각자 짜지만 군무의 경우는 서태지가 가장 춤실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군무에서 만큼은 서태지의 의견이 많이 들어갔다고 한다. 양현석과 이주노도 서태지의 수준에 맞춰서 안무를 짜줬다고 한다.[13] 힙합의 원류인 미국 본토에서 조차도 이 시기 이전까지는 힙합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요 근래 주목받는 특이한 구조의 비주류 댄스 음악'에 가까웠다. 본격적으로 미국 음악계의 주류로 편입되고 열광하는 매니아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도 이후라고 봐야함이 옳다.[14] KBS, MBC, SBS, CBS, PBC, TBS, BBS.[15] KBS1, KBS2, MBC, SBS, EBS/ 그나마도 SBS는 이제 막 개국한 방송사였고, 지방에서 송출되지 않았다.[16] 김종서는 장발이라는 이유로 KBS에서 출연금지를 당한 적도 있다.[17] 당시에는 스크린 쿼터라고 해서 의무적으로 한국 영화를 일정 기간 상영해야 했으며, 공윤으로부터 사전심의도 여전히 받아야 했다. 참고로 한국영화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1996년 영화 검열제가 위헌 판정되고 1990년대 후반 영화 '''쉬리'''의 등장과 이후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시작 부터였다.[18]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서태지가 단순히 작곡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음반을 프로듀싱 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다.[19] 이전에는 컴백, 휴식기 같은 개념이 없었다. 특히 트로트 가수들은 한 번 신곡을 내면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1996년경까지만 해도 가수들의 활동 기간은 굉장히 길어서, 가을에 나온 노래가 이듬해 여름까지 TOP 10을 폭격하는 경우가 잦았다. 심지어 노래의 인기가 식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사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가수도 있었다.[20]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는 뮤직비디오를 소속사에서 별도로 촬영하지 않고, 방송국에서 만든 거리나 세트장에서 임시로 촬영한 여러 영상을 뮤직비디오랍시고 갖다 썼다. 사전에 꼼꼼히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즉석으로 촬영된 비디오에 가깝다.[21] 이것은 PD등의 횡포에 불과 했던게, 스코틀랜드 퀼트를 연상시키는 패션은 유럽 락가수들이 당시에 흔하게 이용하던 패션이었다. 어이없게도, 같은 사항에 대하여 서태지는 금지를 당하였고, 당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스타 김원준은 치마 패션이 허용되었다. 서태지의 파괴력, 그리고 기성세대가 서태지의 위치와 파괴력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는 면모이다. 사실 서태지가 현역이었을 시절이 언론통폐합이나 대놓고식의 검열을 경험한 임직원들이 한창 현역으로 활동했을 때였는데(...) 일종의 찌질한 내리갈굼에 가깝다고도 할수있다. [22]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최고의 그룹으로 불리는 H.O.T.의 앨범을 보면 꼭 하나씩 그런 내용의 노래가 들어간다.[23] 원더걸스 이전에도 동방신기 (2003년 데뷔), 슈퍼주니어 (2006년 데뷔) 등의 보이그룹이 인기를 끌었지만, 대중음악계에서 주류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아이돌이 한국 음악의 메인스트림으로 떠오른 분기점은 원더걸스와 빅뱅, 그리고 소녀시대가 히트곡들을 낸 이후이다.[24] 겨울연가대장금의 대히트 이후 언론에서는 한국 드라마가 대인기라고 대서특필을 했지만 2000년대 내내 막장 드라마들이 최고 시청률을 찍는 바람에 한드의 질이 크게 하락해 버렸다. 한국 드라마가 다시 경쟁력을 가지게 된 것은 2012년 TVN의 응답하라 1997이 히트하면서부터이며, 이후 JTBC와 TVN이 명작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드라마 한류도 재개되었다.[25] 아이돌을 그렇게나 비난하던 기성세대들이 방탄소년단의 성과를 보고는 180도 태도를 바꿔 '케이팝의 훌륭함'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덤이다.[26] 한국에서 막장 드라마가 대세를 차지하여 한드의 질이 대폭 떨어졌었고, 막장 드라마의 주 수요층이 주부들이었다는 사실과도 연관된다. 겨울연가조차 내용은 막장 자체였으며, 미생 같은 고퀄리티 드라마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이들의 수요 덕분이었다.[27] 전술한 웹툰 작가 정철연이 2007년 <마린블루스> 시즌 2.5에서 중학생 시절 해당 팬클럽 소식지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패션변천사'란 그림을 투고했다고 언급하였다.[28] 1998년에 양현석이 '악마의 연기'로, 2000년에 이주노가 '무제의 귀환'으로 각각 솔로 활동을 했을때는 팬들이 노란 우비를 입고 빨간 풍선을 흔들기도 했다.[29] 서태지와 아이들이 신보를 발매했을 때 음반점에서 타 가수의 음반을 구입하면 음반점 주인이 '''서태지 음반 안 사냐고''' 물을 정도였다.[30] 참고로, 3층 센터는 공연을 관람할 목적으로 가면 후회할 정도로 전망이 매우 나쁘다. [31] 영향력으로 놓고 보면 서태지와 아이들의 뒤를 이은 그룹은 H.O.T.라 할 수 있다.[32] 더군다나 그 때는 대부분의 초중고교가 아직 겨울방학 기간이었다.[33] 당시 엠넷과 엠티비는 선진적 음악프로그램을 지향하고 있어 오히려 지상파보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시기 두 방송사에서 서태지와 더불어 지상파보다 더 크게 조명되던 아티스트가 당시 N.EX.T의 리더인 '''신해철'''. 사실상 현대 대한민국 음악계에서 이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두 방송사가 만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4] 시기상으로 봤을 때 교실 이데아, 필승, 컴백홈 정도는 알고 있을 나이대이며 3집과 4집으로 활동했을 때다.[35] 당시의 초등학교 고학년~중고생들도 성인들 못지않게,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되었다는 사실에 전국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똑같았다.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이후 H.O.T.는 1996년, 젝스키스는 1997년에 데뷔했다. 비록 H.O.T.의 팬들과 젝스키스의 팬들이 서로 반목하는 관계로 유명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하고 H.O.T.의 팬들과 젝스키스의 팬들로 서로 갈라졌기 때문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약하던 시기에는 너 나 할것 없이 모두 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했기 때문이다.[36] 당시 1부는 1~4집의 베스트 뮤직비디오들을 상영하였으며, 2부는 초대가수 공연 및 모창대회, 유명인사 축하메시지 상영으로 각각 이루어졌다.[37] 다만 술은 21세기 여가부 심의 때 규제되었다가 비판을 받고 풀렸다. 그 전엔 노랫말에 술이 잘만 나왔었다. 아마도 필자가 다른 규제와 착각한 듯하다[38] 유명 패션지 보그의 10대판이다.[39] 92 환경콘서트의 타이틀이다.[40] 1집 활동 시절 발매되었는데, 곡의 스타일은 3집 스타일의 랩코어에 더 가깝다.[41] 다만 서태지 본인도 그 동안 여러모로 이런저런 잡음들이 많았다. 자세한 것은 서태지 문서 참조.